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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최고 비싼 청나라 건륭황제의 옥새 - 경매가 최고기록 - 전세계 기자들 연합뉴스

Platonic love 2018. 7. 7. 08:56



역사 갤러리 / 세계 위인전


 청나라 건륭황제 편 세계에서 최고 비싼 황제의 옥새 - 경매 기록 - 오늘 특보


청나라 건륭황제 옥새, 세계 경매가 112억원에 낙찰








중국 청나라 황제 첸룽(乾隆·건륭·1711~1799)의 옥새가 또 한번 경매가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지난 8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 나온 첸룽 황제의 옥새 낙찰가는 무려 6338만 홍콩달러. 한화로 약 112억 4800만원에 달하는 고가로 옥기(玉器)경매가 세계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흰색 돌에 ‘건륭어필’(乾隆御笔·황제가 친히 쓴 글이라는 뜻)이라는 4글자가 새겨져 있는 이 옥새는 프랑스의 한 수집가가 소유하고 있다가 경매에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매 전 예상 낙찰가는 약 5000만 홍콩달러였으나 예상외로 경쟁이 치열해져 결국 6000만 홍콩달러가 훨씬 넘는 가격에 팔렸다. 이는 이 옥새가 4년 전 경매에 나왔을 때에 비해 4배나 높은 가격이어서 더욱 주위를 놀라게 했다.

소더비 경매의 중국예술부 관계자는 “세계 경제가 어렵지만 희귀 수집품을 가지고 싶어하는 수집가들의 욕망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듯 하다.”며 “특히 옥새처럼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물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경매시장에서 중국 역사, 특히 중국 황제와 관련된 진귀한 물품들에 대한 수요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해 10월 첸룽 황제의 또 다른 옥새가 경매에서 54억원에 낙찰돼 옥기 경매가 세계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청나라 최고 전성기의 황제는 누구인가요





강희 황제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1661~1722 재위)에서 세종 옹정제(世宗 雍正帝:1722~1735 재위)를 거쳐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1735~1796) 중엽까지의 약 130년간을 청나라의 전성기로 본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1661~1722)는 세조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로 즉위했다. 15세때부터 친정을 시작하여 오배의 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복속함시킴으로써 진정한 중국 통일을 이루었다.


강희제는 만주의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으로 진출한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제국과 대결하여 그들을 알바진의
요새에서 물러나게 하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의 북쪽 국경을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또는 어얼구나 강, 하이라얼 강), 헤이룽 강(아무르 강 또는 흑룡강)으로 정했다. 그후 40여 년 간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 몽골의 준가르부(준갈이부, 準喝爾部)를 토벌하는 등 정벌을 계속하여 제국의 영토를
외몽골, 티베트, 준가리아(준가얼), 투르키스탄, 네팔 지역에까지 확장했다.


문화적으로는 한자 5만여자를 부수별, 획수별로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했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
용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을 총애했다. 강희제 치세에 이르러 광동 성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
했다. 그러나 말년에 자식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여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강희제는 69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그 뒤를 넷째 아들 옹정제(1722~1735)가 45세의 나이로 계승했다.


옹정제는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부황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청나라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는 평
가를 받는다. 옹정제는 세금을 단일화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때 시작한 백
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것을 탄압하는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도 하
였다. 하루 4시간밖에 자지않고 정무에 몰두하다가 과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옹정제의 최후
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1735~1795)는 몽골 제국을 제외한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

를 완성했다.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을 침공

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3억 명을 넘었으며, 전 왕조인 명나라의 인구가 6천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것이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하여 경전과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옹정 황제





옹정 황제



옹정제는 (영어로 YongZheng Emperor, 중어로 雍正帝)라고 표기하고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윤진(胤
禛),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짧은 시호로는 헌황제(憲皇帝)이며 연호는 옹정(雍正)입니다.

또한 만주어로는 후왈리야순 톱 한(Hūwaliyasun Tob Han), 몽골어로는 나이랄트 퇴브 칸(Nairalt Tov Khaan)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강희 17년 음력 10월 30일(1678년 12월 13일)에 태어는 그는 청의 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
이며 강희제의 후궁출신인 덕비(德妃) 오아씨, 훗날에 황태후로 추촌된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의 첫째 아들입니다. 근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덕비 오아씨는 만주족 출신으로 딱히 높은 가문의 사람은

아니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섯아이를 낳았고 또 그녀의 두 아들들인 4황자와 14황자가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던 것을 보면 그녀는 총애로 먹고 살았던 청황실에서 상당히 높은 지휘를 받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건륭 황제




건륭 황제



건륭황제는 강희제의 손자로 옹정제의 넸째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강희제에서 건륭제제 이르는 기간 동안이
청나라 최고의 전성기였죠. 특히 건륭황제의 치세는 십전의치라 하여 완벽한 통치였다고 칭송을 받았죠.
그러나 사실 건륭황제는 옹정황제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건륭황제의 어머니인 니우 훌라는 옹정제의
빈이었고 옹정제는 니우 훌라에게 아들을 낳지 못하면 빈을 폐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니우 훌라는 결국 딸
을 낳고 말았고 니우 훌라는 아무도 모르게 같은 날 태어난 대신의 사내아이와 자신의 딸을 바꿔치기 했다고 합니다. 옹정제는 그 사내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고 기뻐하며 니우 훌라를 황후에 봉하게 되었고 바뀐
아이는 황제가 되어 60년 동안 청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죠.



강희제


강희제는 청나라의 4번째의 황제다. 그는 여덟 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섭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
다. 기록상으로는 열네 살 때부터 친정에 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61년 동안 집권하면서 티베트와 외몽
고를 치고 다스려서 국토를 넓혔고, 이곳저곳에서 준동하는 반정부 세력을 완벽하게 정비하였다. 백성들은 환
성을 지르며 그의 치적에 만족을 표시했다.


청나라가 17세기 이후 세계적인 강국이 되는 데는 강희제의 리더십에 힘입은 결과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므
로 그 후 정윤제(正胤帝), 융희제(隆熙帝)로 이어지는 131년 동안을 청나라의 ‘전성기’라고 하는데 대하여 누
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강희제의 정치적인 식견과 신념, 그리고 표준은 그가 죽기 5년 전에 미리 써둔 그의 유서, 즉 <고별상유(告別
上諭)>에 잘 나와 있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 이 보편적인 생각은 세계의
어느 지도자에게도 필요한 자질이며 덕목이다. 우리 대통령이 그 범주 안에 들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
나 식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행실로 옮기는 표준이 서있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도 익히 경험한 대로다.


강희제에게는 다스리는 자의 좌우명이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한결 같이 ‘국궁진력(鞠躬盡力)’을 지표로 삼았
다. ‘국궁’은 ‘두 손을 마주잡고 허리를 굽혀서 상대를 존경한다’는 뜻이고, ‘진력’은 있는 ‘힘을 다한다’는 뜻이
다. 그러므로 자신은 스스로 두 손을 마주잡고 백성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겸손함에 모든 것을 다 쏟겠다는 신
념이다. 자신이 먼저 있는 힘을 모두 쏟아서 백성들을 아끼고, 또 상전으로 모신다면 백성들은 반드시 안거낙
업(安居樂業)을 할 것이라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


- 인터넷 검색 및 편집 -


중국문화가 세계적이 될때는 벌써 강희제째부터 발단이되었으며


최초로 강희제가 진정한 중국통일을 이루었으며

그 다음으로 아들되시는 옹정제가 통치 체제를 완비했다고 할수있으며

그 다음에는 손자되시는 건륭제 시기에는 그걸 빛내는 최로로 화려한 문화를 빛낸 시기라 하겠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세분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시기를 강건성쇠라고 하며 이 세분은 개발을 반대하며

역사 전통문화 지키기에 총력을 다했으며 만약에 각 지방에 있는 관료들이 실수로 옛 건축물들을 부쉈다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복원하려면 불가능하므로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국민을 괴롭히는 난폭한 난개발 재건축을 일체 못하게 했으며 지역의 시민들이 사는 건축들은 지방의 행정 관료가 디자인 해주는것이 아니라 살고있는 건축물소유주가 원해서 옛 모양을 그대로 보존하는것이므로 현재의 시장이나 군수 관료가 자기네 입맛대로 재건축 재개발 명분으로 바꿀 권한이 없다며 이를 어길시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경고를 지방관료들에게 해서 모든 국민들의 재산 지키기에 관료가 남의 건축물을 참견할 권한이 없으며 이를 어길시에는

중벌로 다스리는 엄격한 정책을 해서 중국의 모든 국민들의 칭송을 받는 중국 최고의 황제들이 된 것입니다.


즉, 부순것을 다시 복원하려면 불가능하므로 처음부터 옛 문화를 보존하기 정책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강대국 중국이 된것을 후대에 모든 중국인들이 칭송을 하는건 우리 한국인들이 정말 너무도 부러운 정책입니다.


~~~~~~ 글쓴이 : 옛문화 보존하기 대변인 겸 수필가 ~~~~~~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중국의 서울 북경 자금성이 있는 전경이다. 보다시피 한국같은 원룸은 한개도 없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다닥 다닥짓는 원룸 신도시같은건 한개도 찾아 볼수없다. 역시 중국은 전통문화의 대표국가답게 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자연이 어울어진 수풀림이 옛문화 주택 그대로다.




북경에서 떨어진 남경쪽도 지방 도시는 시골처럼 자연 그대로다.





북경에서 반대방향인 남쪽도 옛문화 그대로다. 중국의 국보 미술인 청명상하도를 옛 미술품대로 그대로 보존했다하여 세계적인 관광지역으로 유명한 관광도시인데도 모든 지방 도시는 옛시골처럼 자연 그대로다.




~~~~~~ 글쓴이 : 옛문화보존하기 대변인 겸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