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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풍 그 시절 추억의 향기 ~ (수필작가 조훈선생의 스토리)

Platonic love 2014. 3. 11. 22:05

(50년전 이야기 제2편) 지난번 기록지에서 쟈니부러더스와 쎄시봉 사회자였던 원로음악평론가 이백천씨의 논쟁으로 오기택선배의 남산부루스에 얽힌 이야기를 쓰느라 조훈 인터넷블로그컴의 인기관리를 위해 지루하지 않게 스피디하게 전개하느라 빠트린 부분을 추가로 쓰려고 필을 들었다. 1960년대 그 당시 쎄시봉에 유명한 인물이 또 있다. 놀라지 마시라. 바로 이백천씨가 미쓰박이라고 부르는 여성분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그 유명한 박인희누나다. 모닥불 피어놓고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가수인데 그 당시 쎄시봉음악감상실의 청소년들이 누나라고 불렀는데 우리 또래들이 모두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인기가 톱이였던 당시 포크음악의 선두 주자로써 인기가 굉장했던 누나였다. 그 누나가 이젠 원로가수가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아카데미음악감상실 이야기가 빠지면 안된다. 바로 화백가수 조훈의 그라운드이기 때문이다. 조훈이 쟈니남으로 활동하던 무대가 된다. 나는 최고의 멋쟁이로 통했다.

사회자 지미가 나를 멋쟁이로 소개를 해서 그 때부터 나는 멋쟁이로 유명해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검정색 중절모자를 쓰고 부드러운 연한 검정색가죽 양복 상의에 불루진 청바지에 굽이 높은 서구식의 부츠구두를 신고 무대뿐만 아니라 서울시내를 활보했으니 나는 유행을 앞서 나간것이 모든 캐릭터를 그리는 만화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 신세대유행보다도 더 획기적일 것이다.

내가 그 당시 본보기로 생각했던 당시 최고째즈싱거였던 남석훈선배 이름의 훈짜을 따서 조훈이라고 했듯이 나의 또 하나의 예명인 쟈니남도 남석훈선배의 남과 쟈니리선배의 쟈니짜를 따서 쟈니남이라고 지은 것이다. 아카데미 무대에서 원더걸인유어암스를 불렀고 웟 아이쎄이를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 때 관객들을 상대로 춤 댄스타임이 있었다. 지미가 사회를 보는 코너였는데 춤 신청자들이 디제이와 지미의 진행으로 차례대로 춤들을 뽑낸다. 물론 나야 당시 아마추어 째즈가수니까 팝송(당시 째즈라고불렸음)을 부르면서 관객들이 추는 댄스타임 무대에도 춤을 가끔 추었다. 차례대로 춤들을 추었는데 유독 인상적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노는 친구들이 형 형하고 부르며 알랑방구를 꾸는 빌붙는 간사한 친구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친구가 어떤 사람한테 형이라고 하며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대상인데 바로 내 후배동생뻘되는 여학생하고 춤을 같이 추었던 사람인데 어느 간생이같은 친구가 무슨 환형이라고 부른 것 같았는데 그 이후에 tv에 어느 가수가 나왔는데 꽃순이를 부른 가수였는데 어디서 본듯한 얼굴같기도 하고 훅시 그 가수가 이름에 환짜가 들어 가는데다 얼굴도 비슷했던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꽃순이의 가수 환이였는지도 모르고 좌우간 내 추측이 맞다면 꽃순이를 부른 가수가 오래된 가수로 1960년대 가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간다. 조훈은 극장쇼에서는 이름을 조훈으로 활동했고 뮤직홀에서는 쟈니남으로 활동했다.

그 당시 톱싱거 남석훈선배와 같이 극장쇼의 톱싱거 쟈니리선배도 굉장한 인기로 원조 가죽양복상의에 청바지입고 째즈를 부르며 트위스트김선배의 댄스상대로 호홉을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인기가 요즈음 가수는 댈것도 아니였다.

쟈니리선배가 제일 먼저 그 당시 획기적인 가죽상의에 청바지를 입었고 그 다음 소년째즈싱거 쟈니남(조훈)이 모방을 하느라 두번째로 가죽양복상의에 청바지에 굽이 높은 부츠구두를 신고 멋진 중절모자를 썼으니 청소년중에서는 제일 먼저 였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만화에 열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 스무살의 어린 나이에 과학공상만화 철인삼국지를 집필하여 대 힛트를 하여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1년이상을 씨리즈로 3일에 한권씩 원고를 그렸다.

그러다가 한국일보사에서 소년한국일보에서 만화국이 신설되어 당시힛트작가였던 나는 조건이 좋은 한국일보에 전속작가로 입사 하게 되어 이적을 히였다. 그러다 보니 전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인 우량만화로 호평속에 씨리즈로 끌던 철인삼국지를 장편씨리즈로 그리다 보니 질질 끌며 욹어 먹기 원고작성은 그만 두게 된 것이고 그 이후에는 후배만화가가 바톤을 이어 그렸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마구 날치기로 그려 댔는지 불량만화로 찍혔다는 소문이 있는데 좀 씁쓸한 기분이들기도 했었지만 다 흘러간 일이 된 것이다.

이후 나는 홍대 졸업을 앞두고 뜻한바 있어 사찰에 입산하여 스님이 되어 수도를 하고 한국 최초에 다양한 예술가스님으로 명성을 쌓으며 신도분들에게 스마일스님이라는 추앙믈 받게 되는 좋은 스님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지금도 열심히 예술을 펼치고 있다.

글쓴이 : 다 방면 문화예술가 화백가수겸 수필작가 happy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