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수 조훈선생의 노래자랑 심사위원장을 하던 시절 이야기
1974년 10월 (음력 8월15일)
추석특집 새마을회관 노래자랑콩쿨대회가 맹동에서 열렸다.
심사위원이 두사람이 봤는데 맹동이장이 심사를 보는데 조훈선생이 놀러 갔다가 심사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심사를 보게 되었다. 명예심사위원장인 셈이다. 예선에 120명이 참가하여 그중에서 20명을 가려내어 본선대회를 하여 1위에 장애인여성인데 이미자노래 흑산도아가씨를 원가수인 이미자 비슷하게 불러 1위후보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남진의 노래 그대여 변치마오를 원가수인 남진 비슷하게 부른 남자를 1위후보로 올려 놓아 두사람이 경쟁을 하게 하였다. 당시 남진 나훈아와 함께 인기대열에 있던 맹인가수 이용복의 달맞이꽃을 부른 참가자겸 반주자 밴드마스터인 키타리스트를 4위로 하였다. 3위는 나훈아 노래를 불렀던 참가자였다.
자 ~ 드디어 대망의 결선이 시작되었다 !!!!!!
모두가 긴장된 가운데 두 1위 후보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막상막하~
결국 1등은 신체발달의 장애의 몸인데도 노래를 이미자 비슷하게 부른 여성참가자로 선정했고
남진 비슷하게 부른 남자참가자를 2등으로 하였다.
대회가 끝나자 밤 늦은 시간이 되어 수백명의 인파가 각자 집으로들 가는데 인근 주민들이
거의 관객으로 몰려 들었기 때문에 시골길이 많은 인파로 뒤덮였었다.
그 당시 약관의 나이 20대 초반의 젊은 미남예술가가 노래자랑 심사위원장을 본 일로
미남예술가인 조훈선생은 수천 가옥의 호수가 넘는 시골 지역의 최고 스타로 상승하였다.
(5) Ray Peterson (레이 피터슨)의 Corina Corina (6) Cliff Richard (클리프 리챠드)의 When The Girl In Your Arms
(7) 화류춘몽과 (8) 해조곡등의 한국노래는 사회자(MC)가 불르라고 시킬때 앵콜곡으로 번갈아 불렀었다.
공연했던 극장이름 ☞ (1) 서대문구 대현동 신촌 신영극장 (2) 마포구 대흥동 현대극장 (3) 종로 우미관 (4) 미아리 미도극장
활동했던 음악살롱이름 ☞ (1)광화문 아카데미 (2)종로 뉴월드 (3)종로 무교동 쎄시봉 (4)종로2가 디쉐네 (5)명동 쎄시봉 (6)명동 미도파 살롱
그러나 이후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을 풍미하던 조훈선생은 만화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동양화 미인도작가로 전향하여 국전에서 초기출품작이 특선하여 맹활약을 펼치다가 뜻한바있어
대본찰에 입산하여 큰스님 반열에 오르며 취미로 하던 노래를 접는다.
수십년을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조훈선생은 큰스님이 되어 여러 사찰들을 주지스님으로
직접 운영하며 중앙상임포교사로 활동하며 화가스님으로 문화예술포교활동을 열심히 하며
이후 1999년 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 까지 중국노래 첨밀밀을 한국에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훈선생에 대한 찬반론이 쟁점이 된 가요계를 극복하고 대중들에게 유명한건 50년동안을 정식가수를
하지않고 흔한 가수틀에서 벗어나 가수보다 노래를 더 잘부르는 비전문가수라는 새로운 유행을 시도한
과감한 뱃짱이 후배가수들이 들끓는 가요계에는 아랑곳하지않고 즉, 대선배가수라는 위상의 갑질을 포기하고 신선한 장르를 만들었다는데에 독보적인 개척자가 된 것이다. 즉, 미래를 구상하는 선견지명이 예견된것처럼 지금은 가수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이젠 가수보다 일반인들중에서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스타일이
요구되는 때에 조훈선생의 작전이 맞아 떨어진 새로운 장르가 열렸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이다.
중저음 장르의 개척자로써 조훈선생의 작전은 한국 저음의 원조격인
국민저음가수 4인방